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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농경의 자존심이자 뿌리 김제

by note7814 2025.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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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서부 평야의 중심에 위치한 김제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 문명과 함께 성장한 대표적인 농경 도시입니다. 고대 백제의 벽골제에서 시작된 김제의 역사는 조선시대 곡창지대의 핵심을 지나,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에는 농민운동과 민중 저항의 중심지로 이어졌습니다. '금(金)의 제방(堤)'이라는 이름처럼, 김제는 그 땅이 품은 물과 곡식만큼이나 풍부한 역사와 정신적 유산을 간직한 고장입니다.

수리 농업이 번성한 비옥한 들판

‘김제(金堤)’라는 지명은 문자 그대로 ‘금(金): 귀한 곡물’과 ‘제(堤): 둑 또는 저수지’를 뜻합니다. 실제로 김제는 삼국시대 이래로 국내 최대의 인공 저수지인 벽골제(碧骨堤)를 중심으로 수리 농업이 번성한 지역이며, 이러한 수리시설과 비옥한 들판을 통해 쌀 생산량이 매우 풍부했던 곳입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김제 지역은 고대로부터 금교(金郊), 금지(金池), 김지(金支)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김제'라는 지명이 정착됩니다. 조선시대에는 ‘김제현’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기에는 ‘김제군’이 되었으며,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와 함께 ‘김제시’로 승격되었습니다.

김제는 한반도 최대 평야지대인 호남평야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그 넓은 평야는 예로부터 곡창지대, 즉 민중의 생명창고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곡물 생산기반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김제라는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농경 문명의 시원과 생산력, 그리고 수리 기술의 정수를 상징하는 상징적 명칭입니다.

한반도 최초의 농업용 저수지와 민중이 만드는 역사

1. 고대 수리문명과 벽골제의 건설

김제의 상징이자 한국 수리 문명의 정수는 단연 벽골제입니다. 벽골제는 백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며, 총 길이 3.3km에 이르는 대규모 저수지였습니다.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벽골제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이는 한반도 최초의 본격적인 농업용 저수지로 평가됩니다.

벽골제는 농업의 안정적 기반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고대 국가의 조직력과 기술력, 그리고 공동체의 협력 정신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9개의 수문이 설치된 벽골제는 주변 농경지를 유지하며 백제의 식량 기반을 책임졌고, 이는 정치 안정과 군사력 유지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현재도 벽골제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으며, 제방 유적 주변에는 벽골제 관광지와 수리민속박물관, 김제 지평선축제장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김제가 농업 유산을 현재의 문화 관광 자원으로 전환한 대표 사례입니다.

2. 조선시대 곡창지대의 기능과 농업 문화의 융성

조선시대에 김제는 전국 3대 곡창지대 중 하나로 손꼽혔습니다. 특히 김제는 넓고 평탄한 지형과 수리 시설 덕분에 벼농사 중심의 고밀도 농업 경제가 발달했습니다. 김제의 농업 생산량은 당시 조정의 재정 수입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김제 쌀이 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속담이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장시(시장)와 포구를 중심으로 한 상업 활동도 활발해졌으며, 김제는 곡물 교역의 중심지 역할도 했습니다. 김제장터에는 전국 각지의 상인과 중간 상공업자, 쌀 도매업자, 조정 납세업자들이 모였고, 이는 김제가 단순 농업 도시가 아닌 농업+유통+행정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3. 일제강점기 김제 소작쟁의와 농민운동

김제의 현대사는 농민운동의 역사와 깊게 맞닿아 있습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김제에서는 전국 최대 규모의 소작쟁의 운동이 발생했습니다. 일제 수탈과 지주 중심의 착취적 소작제에 반발하여 김제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소작료 인하, 소작권 보호, 농민 권리 확대를 외쳤습니다.

특히 1927년 이후에는 김제농민조합, 전북농민총동맹 등이 조직되며, 김제는 농민운동의 성지로 부상합니다. 농민운동은 단순한 경제 투쟁이 아니라, 사회 개혁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으며, 3·1운동과도 연결되어 수많은 만세운동과 지하 항일 조직이 이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해방 이후 농지개혁, 협동조합 운동, 농민 조직화의 모델로 김제가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제는 지금도 ‘민중이 스스로 역사를 만든 도시’로 기억됩니다.

농업의 역사를 이어 받은 스마트 농업 도시로 전환

1. 벽골제 유적과 수리민속박물관

김제의 핵심 유산인 벽골제는 1990년대 이후 복원 및 정비 작업을 거쳐 관광지이자 교육의 장으로 거듭났습니다. 벽골제 유적지에는 복원된 제방과 수문, 백제 시대의 농업 도구 전시관, 수리 민속 관련 체험 공간이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공간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고대 국가 시스템과 농업기술을 후손에게 전하는 생생한 교육현장으로 활용됩니다.

2. 김제 지평선축제 – 농경문화의 현대적 재해석

매년 가을 벽골제에서 열리는 김제 지평선축제는 단순한 지역축제를 넘어, 국제적인 농업문화축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축제는 전통 벼 수확, 풍년제, 탈곡 체험, 논물놀이, 가을음식 체험, 농악놀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며, 농경문화와 공동체 정신을 즐기는 체험형 축제입니다.

2008년에는 UNWTO(세계관광기구)로부터 세계축제 모범사례로 선정되었으며, 매년 3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김제의 대표 브랜드 행사입니다.

3. 금산사 – 불교문화의 중심

김제 금산면 모악산 기슭에 위치한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미륵신앙과 화엄사상의 중심지로 불립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중창과 확장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미륵전, 대적광전, 노주, 오층석탑 등 다수의 국보·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금산사는 현재도 템플스테이, 불교문화체험, 명상캠프 등 현대적 활용이 이루어지며, 정신문화와 관광자원의 결합 사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현대 김제의 도시 정체성과 미래 비전

  • 스마트 농업 도시로의 전환: 김제는 스마트팜, ICT 농업, 종자산업 등의 미래농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김제농생명ICT산업단지는 핵심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 농산물 브랜드화: 김제쌀(지평선쌀), 김제배, 찹쌀, 복분자 등은 전국 유통망을 통해 고급화되었고, 지리적 표시제 등록 및 수출 확대가 진행 중입니다.
  • 지속가능한 농촌관광지 개발: 농촌체험마을, 귀농귀촌 프로그램, 농업문화 교육을 통해 김제는 지속 가능한 농촌교육·관광 도시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한국 농경문명의 뿌리이자 생명의 고장

김제는 이름 그대로 ‘금(金) 같은 제방(堤)’을 품은 도시이며, 한국 농경문명의 뿌리이자, 민중의 역사가 깃든 생명의 고장입니다. 벽골제에서 시작된 수리 문명은 백제의 식량기지로, 조선의 곡창으로, 일제하 항쟁의 중심으로 이어지며, 김제는 늘 시대의 민생을 책임져온 도시였습니다.

지금의 김제는 과거를 기억하며, 스마트농업과 문화관광으로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전환점에 있습니다. 김제를 방문하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한국인의 삶과 역사, 민중의 숨결을 직접 느끼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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