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은 전라남도 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예로부터 자연환경과 학문, 그리고 항일 정신의 중심지로 평가받아 왔습니다. 특히 지명에서부터 온화함과 평화를 상징하며, 그 의미와는 달리 수많은 역사적 파고를 겪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순천’이라는 이름의 기원과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순천이 간직한 문화유산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천명을 따르는 고을
‘순천(順天)’이라는 지명은 한자로 ‘순할 순(順)’과 ‘하늘 천(天)’을 사용하여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도시’, 혹은 ‘천명을 따르는 고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의 순천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 행정 구역 개편 당시 처음 공식 사용되었으며, 고대부터 이어져온 지역의 성격을 반영한 명칭입니다. 그 이전에는 이 지역이 구천(龜川), 승주(昇州), 해양현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승주’라는 명칭이 널리 쓰였고, 조선 초기까지도 승주목으로 불리다가 후에 순천으로 바뀌었습니다. ‘순천’이라는 지명은 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순응이라는 유교적 가치관이 강하게 반영된 표현으로, 조선 초기 국가적 이념과도 일치하는 상징성을 지닙니다. 순천은 조계산과 순천만, 동천강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으로, 고대부터 농업과 수운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하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곳’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실제로도 순천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며 발전해 온 도시입니다.
항일운동과 사회운동의 거점
순천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교육과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수많은 학자와 유생이 배출된 지역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승주와 함께 순천향교, 서원, 서당 등이 활성화되며 영호남 지역의 학문 허브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사림 계열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유학적 기반이 강한 도시로 자리잡았습니다. 근대사에서는 순천이 항일운동과 사회운동의 거점 도시로 부각됩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순천 학생들과 주민들은 대규모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며, 이후 1920~30년대에는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야학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순천의 진보적인 사회 분위기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여순사건(1948년) 당시 중심적인 지역 중 하나가 되었으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역사도 안고 있습니다. 또한 순천은 한국전쟁 이후 도시 재건과 교육 개혁, 생태 복원 운동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오늘날까지도 지역 커뮤니티의 자발성과 참여도가 높은 도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자연과 전통, 공동체의 조화 생태도시
오늘날 순천은 ‘생태 수도’라는 별칭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으며, 순천만과 순천만 국가정원은 국내 최고의 생태 관광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순천만은 갈대밭과 갯벌, 철새들이 어우러진 천혜의 생태계로, 2003년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후, 지속 가능한 도시의 모범사례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013년 개최된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는 44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끌어들이며 전국적인 생태문화 붐을 일으켰고, 이후에도 순천은 지속가능한 도시 브랜드, 교육·관광·환경의 균형 도시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또한 순천향교, 낙안읍성, 선암사와 송광사 등 전통 문화유산도 풍부하며, 자연과 역사, 종교가 공존하는 도시로 손꼽힙니다. 특히 낙안읍성은 전국 유일의 민속마을이 살아 숨 쉬는 읍성으로, 실제 주민이 거주하며 전통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곳입니다. 이는 과거와 현재, 삶과 문화가 동시에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평가받으며 순천의 문화 정체성을 대표합니다.
순천은 이름처럼 ‘하늘에 순응하는 고을’이자, 자연과 전통,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며 성장한 도시입니다. 고려와 조선을 아우르는 학문의 중심지, 근대의 사회운동 거점, 그리고 현대의 생태문화도시로서 순천이 걸어온 길은 도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순천이라는 이름에 담긴 철학과 역사를 되새기며, 그 안에서 우리 삶의 가치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