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는 전라남도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로, 근대기 개항의 중심지이자 문화, 경제, 독립운동의 핵심지였습니다. 지명에 담긴 뜻부터 항일정신, 그리고 항만을 기반으로 성장한 도시 구조까지 목포는 단순한 항구 도시를 넘어선 깊은 역사성과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목포의 지명 유래,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 그리고 현재의 도시 정체성에 대해 심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나무가 많고 강가에 있는 포구
‘목포(木浦)’라는 이름은 한자로 ‘나무 목(木)’과 ‘물가 포(浦)’를 사용하여 ‘나무가 많고 강가에 있는 포구’, 또는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항구’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목포는 유달산을 중심으로 내륙과 바다가 만나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이 같은 지명 유래는 지형적 특성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역사적으로 목포는 백제시대에는 무무포(武武浦)라 불렸고, 고려시대에는 ‘목포만’ 일대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목포(木浦)’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교통 요충지로 성장하게 되었고, 수산물과 곡물 유통의 중심지로 발전해 지명도와 실질적 기능이 함께 확장되었습니다.
호남 내륙의 경제력을 세계로
목포는 1897년, 조선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근대 개항 도시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도시 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인천, 부산, 원산에 이은 네 번째 개항장이자, 호남 내륙의 경제력을 세계로 연결하는 관문으로의 기능을 상징했습니다. 개항 이후, 일본은 목포항을 자신들의 곡물 수탈 창구로 활용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인 거류지, 철도 및 항만 시설이 집중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목포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계급과 공간 분리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도시로 재편되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과 차별은 항일의식의 형성과 독립운동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특히 목포는 3·1운동 당시 전라남도 내에서 가장 큰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난 지역 중 하나로, 학생과 시민이 대거 참여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목포는 신간회 활동,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 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항일 투쟁의 전진기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목포는 ‘전남도청 소재지’로 행정·교육의 중심 역할을 하다가, 광주에 도청이 이전되며 지역 정체성이 재편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다시 해양수산 산업과 문화 중심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대표 근대사 박물관형 거리
오늘날 목포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하면서도, 문화와 관광, 해양산업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도시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목포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정비되며, 1897년 개항 이후 형성된 일본식 가옥, 구 목포부청사,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목포진 역사공원 등이 대한민국 대표 근대사 박물관형 거리로 조성되었습니다. 목포는 또한 노적봉예술공원, 유달산, 갓바위, 삼학도 등 자연경관과 함께 역사문화공간이 잘 어우러진 도시로, 걷기 좋은 거리, 스토리텔링 투어 코스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또한 ‘목포 해상케이블카’, ‘스카이워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등 현대적 관광자원과 역사 유적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 재생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목포항구축제, 목포문학관 등이 지역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며, 단순한 항구도시를 넘은 전남의 대표 문화관광도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목포는 단지 바다를 낀 도시가 아니라, 항구를 통해 세계와 이어지고 역사와 항일 정신, 문화의 혼이 켜켜이 쌓인 상징적인 도시입니다. ‘목포(木浦)’라는 지명에 담긴 풍경만큼이나, 그 속에 담긴 근대사와 시민 저항의 서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울림을 줍니다. 목포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단순한 풍경을 넘어 그 땅의 이름과 이야기 속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