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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나주

by note7814 2025.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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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중부에 위치한 나주는 예로부터 영산강 유역의 중심지로 기능하며, 정치·경제·문화의 주요 거점 역할을 수행해 온 도시입니다. 한반도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나주는 지명 자체에 유서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으며, 다수의 역사적 사건과 함께 전남 지역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본문에서는 나주의 지명 유래, 역사적 사건, 그리고 현대 문화유산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고을

‘나주(羅州)’라는 지명은 한자로 '비단 나(羅)'와 '고을 주(州)'를 써서 ‘비단처럼 아름다운 고을’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고려시대에 정착된 명칭이며, 그 이전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고대 마한 54국 중 하나였던 복속국 혹은 나주국이 이 지역에 존재했고, 백제시대에는 금현(錦縣)으로 불리며 지역 내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신라가 이 지역을 통합한 후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불렸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정벌 후 이 지역을 재정비하며 ‘나주’로 개칭하였습니다. 왕건은 이 지역의 풍요로운 물산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높이 평가했으며, 비단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의미에서 '나주(羅州)'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나주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영산강 수운과 내륙 교통의 중심에 자리해 상업과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전라감영이 한때 위치했던 중요 행정 중심지였고, ‘목사 고을’로 불릴 만큼 위상이 높았습니다.

항일정신으로 성장한 나주

나주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을 위한 과정에서 후백제의 거점이었던 나주 지역을 점령하며 남부 내륙의 군사적 요충지로 삼은 것이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 전투는 후백제 세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통일전쟁의 판세를 좌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나주가 전라병영과 감영이 설치된 군사·행정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각종 군사적·행정적 결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위상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유생과 관리들이 나주로 유입되었고, 이는 곧 교육과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근현대사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의 여파가 나주 지역까지 확산되며 농민들이 봉기하였고,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 나주지부의 조직적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나주 학생들 역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민족운동에 중요한 힘을 보탰습니다. 이러한 항일정신은 해방 이후에도 지역 교육과 시민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풍요와 문화, 항쟁과 혁신을 모두 품은 나주

오늘날 나주는 단순한 농업도시를 넘어서, 전통과 첨단이 공존하는 역사문화도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산으로는 나주읍성, 금성관, 영산포 옛거리, 그리고 목사내아 등이 있으며, 이는 조선시대 관아 문화와 지역 통치의 흔적을 생생히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또한 나주 배로 대표되는 농업 브랜드는 나주 지역의 경제 기반을 지탱하고 있으며, 빛가람혁신도시가 조성되며 한전, 에너지 관련 공기업 및 연구기관이 입주해 행정·과학 중심도시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과거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였던 나주의 정체성은, 현재는 전력, 정보, 에너지 허브로 이어지며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영산강 문화제, 금성문화제, 나주국악제 등이 꾸준히 개최되며 지역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지역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산업과 인구 유입을 통해 균형 잡힌 발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주는 단순한 전라도의 한 도시가 아닌, 고대 마한의 중심지에서부터 고려·조선의 군사·행정 핵심, 그리고 현대의 첨단도시로까지 변화해온 역사의 도시입니다. ‘비단 같은 고을’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풍요와 문화, 항쟁과 혁신을 모두 품은 나주는 오늘날에도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나주의 이름과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한국 남부지역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관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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